webmagazine Kamui Mintara

1986.05/Volume14  [Special Issue]    

나의 청춘은 그 얼마나 어리석고 한결같은 것이었을까
하지만 그 어떤 돌멩이도 다시 노래함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시대와 나  미우라 아야코

  미우라 문학 속에 자전소설 4부작이 있습니다. '들풀의 노래', '돌멩이의 노래', '길은 여기에', '이 질그릇에도'. 그 제2편에 속하는 '돌멩이의 노래'는 1935년 (쇼와 10년) 4월, 군국 소녀로 아사히카와 시립 고등 여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시작해 그 뒤 군국 시대의 초등학교 교사로 "죽은 교육"을 해 오며 세상이나 사회의 조류에 무지한 채로 밀려가는 데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 그 잘못을 알고 깊은 자아의 불신에 빠진 미우라 아야코가 허무한 요양 생활에 들어가는 1948년(쇼와 23년)까지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1972년(쇼와 47)부터 1973년(쇼와 48)에 거쳐 4부작 중 가장 마지막에 집필되었고, 작자 자신도 "나의 청춘은 그 얼마나 어리석고 한결같은 것이었을까" 라고 말한 '돌멩이의 노래'라는 작품의 세계가 과연 어떠한 시대였으며, 오늘날 그것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미우라씨의 남편 미쓰요씨와 함께 말씀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イメージ(아사히카와 시립 고등 여학교 본과 3학년 진학을 기념하여 1938년(쇼와 13년)=오른쪽으로부터 두번째)
아사히카와 시립 고등 여학교 본과 3학년 진학을 기념하여 1938년(쇼와 13년)=오른쪽으로부터 두번째

'돌멩이의 노래'는 여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일본이 패전을 맞이할 때까지의, 평범한 여자의 평범한 이야기이다.
 "어떠한 영웅이라고 해도 그 시대를 초월할 수는 없다." (중략) 하물며 평범한 인간은 초월하기는 커녕 이 세상의 시류에 말려들고 밀려나 버리는 약한 존재이다.
 평범한 한 소녀인 내가 점차 군국 시대의 색에 물들어 가다가 마침내는 패전을 맞이해 좌절을 당할 때까지의 자신을 해부해 보고 싶다. (카도카와 서점판·카도카와 문고판, 이하 같음)

당시의 나는 순진했습니다. 교사가 되었을 때도 16,17세의 소녀였기에 오히려 순진하지 않으면 문제였을 테이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군국 교육을 받아 온 아직 어린 소녀로서는 도저히 시대를 알 수도 넘을 수도 없었습니다. 어쨌든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몰랐기에 시키는 데로 따르기만 했습니다.

11인 가족으로방임주의의 가정이었습니다

내가 여학교에 입학한 쇼와 10년 4월 당시의 가족 구성으로부터 말해 보자. 아버지 호리타 테츠야 45세, 어머니 키사 40세, 오빠 3명, 언니 1명, 남동생 3명, 여동생 1명, 나를 포함해 11명의 대가족이었다.

매우 궁핍한 가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버지는 신문사의 영업부장으로 당시 300엔 정도의 수입이 있었습니다. 부모님들의 말씀에 의하면 이 수입은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장남, 어머니가 장녀였기 때문에 세 가족의 가계를 보살펴야 했습니다. 내가 여학교에 입학해서 자신의 손으로 수업료를 낸 것은 입학해서 첫 번째 수업료뿐. 그 뒤로는 전부 "내가 가져가마"고 하시며 납입일에 내지 못하고 나중에 아버지가 사무실에 직접 보내시거나, 사무장이 집까지 재촉하러 왔던 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풍요로웠을지도 모릅니다. 남들에게 베푸는 마음이 부모님들께는 있었으니까. 친척중 누군가가 집에 오면, 가끔 어머니가 조용히 없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근처 공익 전당포에 가 돈을 빌려 와서는 5,6엔 싸서 건네주는 것을 형제들이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의 원칙을 세워 놓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없었습니다. 자식이 많아서 항상 손이 딸렸습니다. 그 탓에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입학식 당일 나를 학교에 데리고 가신것 뿐, 그 뒤로는 학예회에도 졸업식에도 그리고 여학교의 입학식에도 와 주셨던 적이 없었습니다. 자유라 할까 여하튼 나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가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버지는 결코 우리 집안에서 온화한 분은 아니셨다. 오히려 불처럼 격렬하고, 열화같은 급한 성격이셨다. 그러나 한편,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끔찍한 분이셔서 아이들이 열이 나거나 다치거나 하면 곧 안색이 변해 허둥지둥하거나 걱정한 나머지 어머니에게 몹시 화를 내시곤 하셨다. 어린 아이들의 콧물을 종이로 닦으면 아플 거라고 그게 애처로워서 당신의 입으로 빨아 주시기도 하셨고 그걸 우리는 "싫어요, 더러워요. " 하며 미간을 찌푸리곤 했었지만, 한편 내심으로 감동을 하곤 했었다.

내가 교직에 있었을 적에 구입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아버지가 먼저 읽으시고는 "이런 책들 읽으면 불량이 돼" 하며 화를 내셨습니다. 요양하고 있을 때에도 내가 구독하고 있던 잡지를 당신도 읽으시고는, "나 살아 있는 동안은 이따위 것 읽지들 말아!" 라고 하셨습니다. 뭐든지 읽고 나서 화를 내셨습니다. 참으로 완고하시고 불쑥불쑥 화를 잘 내는 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아버지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든든한 체격의 미남이었고 어머니도 예뻤다. 자식이 많아 항상 젖먹이 아이를 안고 정신없이 가사에 쫓기는 몸이었지만, 언제나 기모노를 단정히 입으시고 머리를 예쁘게 틀어 올려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있었다.
 (중략) 자식들에게 잔소리가 심한 어머니는 아니였지만, 우리는 모두 아버지보다도 어머니를 더 무서워 하지 않았던가 싶다.

어머니는 밝고 공정하신 분이었습니다. (친척분들의 생일, 결혼기념일, 기일 등을 잘 기억하고 있었어요=미쓰요 씨)

내가 요양으로 누워 있을 때, 나처럼 누워 있는 친구를 몇 번씩이나 문병 와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쪽과 더 마음이 통했느냐 하면 아버지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마치 은인의 아이를 맡아 기르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을 만큼 나를 귀여워 해주셨습니다. 자주 소설을 읽는 분이셨고 뭔가 서로 통하는 게 있었습니다.

나는 언니와 아주 사이가 좋았습니다. 같은 반에 친구가 있었지만, 마음 열고 이야기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니와는 언제나 마음 다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고 이웃들에게도 "10년 만에 만난 자매 같다"고 말들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그 어떤 일들도 다 용서하고 보듬어 주시는 드넓은 마음의 할머니가 계셔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좋은 환경이란 바로 가까이에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만 나에게 있어서 그 환경이란 특히 할머니와 언니였습니다.

사랑으로 이어지는 교사가 되고자

イメージ(응접실에서 미쓰요씨와 휴식의 한 때를 보내는 아야코씨)
응접실에서 미쓰요씨와 휴식의 한 때를 보내는 아야코씨

나는 차창 밖으로 자신이 부임된 탄광 거리를 주시했다. 산간에 생겨난 이 거리는 하나의 간선도로가 그 가운데에 뻗어 있고 도로 양쪽의 산허리에 몇 갈래의 오솔길이 나 있었다. 산허리에는 일반적으로 하모니카 연립 주택이라고 하는 1동 5호 정도의 연립 주택이 정연하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것은 내가 상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풍요롭고 활기가 있는 거리로 보였다.

여학교의 졸업이 다가왔을 때, 무엇인가 되고 자는 뜻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전쟁 후로는 평화 도로가 된 사단 대로에 출정 병사를 배웅하러 가끔 나가고는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생들도 같이 인솔되어 배웅하러 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선생님, 선생님" 하며 감싸 돌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 선생님은 좋은 직업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랑으로 맺어지는 일을 하고 싶어져 재학중에 자격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배속된 곳이 탄광의 거리·우타시나이 가무이 소학교였습니다.

4월부터 시작된 학교는 결코 평온하기만 한 학교는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도 출근 시간이 너무 일렀다. 교사의 내외를 청소하기 위해 교원들은 아침 5시가 되면 출근해야 했다.
 말 그대로 사람을 가르치는 몸이 되고나면, 아침 일찍부터 학교에 가서 교정을 쓸거나 깨끗하게 해 자아 단련에 힘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구나 (중략) 그러한 직업의식이 나로 하여금 이 이른 아침의 작업에 불평을 하지 않도록 한 것 같다.

교사가 된 것은 지금의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것과 같은 나이입니다.

소라치는 당시 교육 왕국으로 불렸고 그중에서도 가장 활기가 있는 학교로 부임했습니다. 그 어느 선배 교사도, 나는 제 자신의 은사처럼 존경했습니다.

"황궁을 향해 우러러 요배(묵념) 합시다." 학생은 일제히 뒤로 돌아선다.
 "최고 경례! "
 조례를 마치면 숙연히 교실로 들어가지만 (중략) 훈련이 잘 안 된 선생님의 학생은 눈길을 집중 못 하고 머리가 움직인다. 걸음도 흐트러진다. 그래서 어느 선생님이나 엄격했다. 여교사도 가차없이 학생에게 체벌을 가했다.
 그것은 완전한 군국조였지만, 나는 그 학생들이나 교사들의 진지함에 감동되었고 배움이란 이처럼 예의를 갖추고 태도가 진지하여야 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마음속 깊이 느꼈다.

그때는 군국주의가 살판 치던 때여서 마지막에 저한명만 살아남을 지언정 끝까지 싸우리라고 모두가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천황폐하는 살아계신 신이며, 백마를 탄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일본은 신의 나라이니까 패할 리가 없다고 패전의 그날까지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생명은 소중히 여겨야 해요" 라고 했던 교장 선생님이나, "일본은 무조건 항복할지도 모른다" 라고 몰래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것을 들을 귀도 눈도 없었고 소수의 목소리는 금방 지워져 버립니다. 어쨌든, "빨강 잠자리" 라고 말하는 것조차 무서워했습니다. "빨강"이라는 글자가 나오기만 해도 관헌에 끌려가는 시대였으니까요.=미쓰요씨)

어쨌든 국책에 장단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은 열정적이었고 밝았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국책에 반대하면 끌려 가곤 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 깨우쳐 주는 책을 살 수도 없었고, "이거 읽어 봐" 라고 빌려 주는 사람도 없이, 그 누구도 그런 이야기는 절대로 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자신이 일본 역사의 어떠한 시대의 흐름 속에 살고 있는지를 모르는 16세의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어두운 시대였다고 깨우치게 된 것은 썩 뒤의 일이었습니다. 빛을 보고서야 어둠을 깨우치는 것이지, 어둠 속에서는 어둠을 알 수 없습니다.

교과서에 먹을 칠하면서 허무감에 사로잡혀

나는 7년간 심혈을 기울이며 내 학생들을 대해 왔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교단에서 쓰러지는 것을 숙원으로 여기고 살아왔었다. 헌데 그 7년간의 가르침이 패전으로 인해 "교과서에 먹을 칠함"으로서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천황폐하를 위해 죽는 것은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되었고 천황의 자식을 가르치는 것 또한 더없는 영광이었습니다. 수신 교과서를 펼칠 때에는 허리 굽혀 인사시켰고, 조금이라도 책장이 구겨져 있으면 다리미질을 하게 하거나 덮개를 씌우게 했습니다. 그런 교과서에 먹을 칠하다니. 아이들에게는 왜 먹을 칠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바가 없었기에 더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선생님은 잘못해서는 아니됩니다. 아이들이 그토록 신뢰하고 있었기에, 그 아픔은 뭐라고 형용하면 좋을지….

나는 거지가 되려고 했습니다. 거지의 말에 정색할 사람은 없을 것이며, 죽을 때까지 수모당하며 사는 게 최고라고, 나 자신은 그럴 가치밖에 없을 거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여태 가르쳐 온 것은 갚을 레야 갚을 수 없는 죄악이었어, 이젠 더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아무것도 믿지 않아, 아무것도 믿지 않아. 아이들과도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대답을 잃은 나는 결국 패전 다음해의 3월에 퇴직했다. (드디어 나도 폐병에 걸렸다.) 정말로 "꼴 봐라!" 라고 자신을 조소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여태껏 내가 믿고 있던 것은 허의 세계였습니다. 허를 믿고 있으면 허무로 끝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시대의 흐름, 권력의 비정함을 알았으면 좋겠다

イメージ(집필은 하루에 1~2시간, 2층의 서재에서 미쓰요씨가 구술 대필)
집필은 하루에 1~2시간, 2층의 서재에서 미쓰요씨가 구술 대필

시대란 무엇인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가는 것일까. 내가 자랐던 시대, 그 시대의 흐름은 결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의 권력자나 그 배후에서 권력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억지로 하나의 조류를 만들어 그 조류 속으로 국민을 말려들게 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빼앗겼으며 그 운명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걸가. (카도카와 서점판 후기로부터)

(아야코와 세계 곳곳을 돌아보고 맑은 물, 푸른 산, 이 풍요로운 아름다운 일본을 또다시 그 어두운 시대로 되돌려서는 안 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미쓰요씨)

평화와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의 중요함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지금 도도히 시대가 역류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두 번 다시 그 시대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매일 마음을 졸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논하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

지금 이미 언론의 자유도 없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 기밀 법안을 국회에 재제출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우리는 입막음을 당해서는 아니 될 것이며 둘도 없이 소중한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문제로부터 눈을 떼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자신이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도랑 속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라고 생각했다.
 돌멩이였던 나의 청춘은 그 얼마나 어리석고 가벼웠으며 한결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지금도 돌멩이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성서를 알았다. 그리고 성서 속의 다음 말을 알았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루카복음서 19장40절)
 고로 나는 이 책을 썼다. 외치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어떤 눈에 띄지 않는 돌멩이도 노래하는 것임을 사람들이 알게 됨을 바라기에. 그리고 모든 돌멩이를 부수는 불도저와 같은 권력의 비정함을 알게 됨을 바라기에. (카도카와 서점판 후기로부터)

쇼와 10년대와 미우라 아야코의 주변

1935년·쇼와 10년대는 아직 타이쇼 데모크러시를 계승하는 자유로운 사상이 남아 있었다. 호리타 (미우라의 혼전의 성) 아야코가 다닌 여학교도 "민주적이고 밝은 학교였고 자치회 활동도 활발"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서, 치마길이, 레인신발, 유행가금지 라고 하는 교칙들도 그녀의 항의로 인해 취소 시킬 수 있을 만큼 융통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 사변이 일어나고 국내에는 테러 사건, 에로·엽기·넌센스의 풍조가 횡행하고 있어서, 문제의식을 가지지 조차 못한 소녀들이 사회에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암흑"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1935년에 천황 기관설이 문제화 되어 36년(쇼와 11)의 2·26사건, 게다가 그 이듬해의 중일 전쟁에 의해 일본은 군국 시대로 전락한다. "국체의 본의" 라고 하는 책이 국민 교육의 교과서가 되어, "천황이 최대한 신격화되어 그 천황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교육이 시작된 것도 우리는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여" 가고 있었다.

당시의 아사히카와에는 제7사단이 있었는데 그 병사들을 상대로 하는 사창가가 생기고, 거기서 손을떼려고 한 창부가 우시슈베츠가와원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든가, 창가 폐지 운동을 하고 있던 사노 후미코 여사가 일본검에 찔려서도 다시 일어나 연설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여학생들이 위문 가는 육군 병원의 상병의 대부분은 결핵 환자였다.

1939년(쇼와 14), 호리타 아야코는 16세에 대용 교원으로 우타시나이의 가무이 초등학교에 부임한다. 중일 전쟁과 함께 급성장한 탄광의 거리는 밝고 또 한가로웠다. 학교에는 교육에 열정적인 교사들이 많았고, 아이들은 젊은 여교사를 사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매일 밤 빈대에 물려도 대수로워 하지 않는 광부들의 생활이 있었다. 강제 노동으로 이국에 연행되어 우는 아이에게 "일본인이 온다" 라며 마치 일본인을 귀신 대하듯 무서워하며 사는 조선인 가족이 많이 있었다. 그 한편 "자유주의가 제일 좋다"고 누설하는 제2부임처의 교장이나, "인간은 다 같은 정도의 경제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며 채탄부들 틈에 끼여 일하는 "주의자"도 있었다.

그러나 사상 탄압은 가혹하다 못해 국책에 협력하지 않는 자는 "비국민"이라고 백안시되었다. 그리고 세계의 움직임이나 일본의 현상을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일 없이 "나라가 하는 것은 올바르다"고 믿는 것이 서민 대부분의 자세였으며, 호리타 아야코도 또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미우라 아야코씨 약력

イメージ(”평화와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논하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
”평화와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논하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

1922년(타이쇼 11) 4월 25일, 아사히카와시에서 태어나 1939년(쇼와 14)에 아사히카와 시립 고등 여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만 16세에 탄광의 거리·우타시나이의 소학교 교사가 됩니다. 그 후 아사히카와 시내의 소학교로 전근합니다만 패전을 계기로 국가의 기만성과 군국주의 교육의 그릇되었음을 깨닫고 7년간 근무한 교원을 그만두게 됩니다. 얼마 되지 않아 폐결핵 발병, 후에 척추 카리에스가 병발하여 13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게 됩니다. 30세에 기독교의 세례를 받고, 1959년(쇼와 34), 37세에 미우라 미쓰요씨와 결혼. 1962년(쇼와 37) 잡지 "주부의 벗" 제1회 "사랑의 기록"에 '태양은 다시 지지 않는다'가 당선. 1964년(쇼와 39) 42세 때에 아사히 신문 1천만엔 현상 소설에 '빙점'이 입선되어 일약 주목받는 여류 작가로 되었습니다. 그 후 아사히카와시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작품들을 육속 발표하였습니다.

주된 작품으로 '양치는 언덕'(주부의 벗사), '집짓기 장난감 상자'(아사히 신문사), '심판의 집'(슈우에이사), '자아의 구도'(코우분사), '시오가리 고개'(신쵸오사),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주부의벗사), '아마기라 원야'(아사히 신문사), '흙탕물 지대'(신쵸오사), '넓은 미로'(주부의 벗사), '끝없는 언덕'(슈우에이사), '센리큐와 그의 아내들'(주부의 벗사),그 외 수필, 서간집 등 다수. 1983년(쇼와 58)에는 아사히 신문사로부터 "미우라 아야코 작품집"이 간행되어 국외에서도 많은 나라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미우라 미쓰요씨 약력

イメージ(”두 번 다시 어두운 시대로 되돌아가서는안 된다.”미쓰요씨)
”두 번 다시 어두운 시대로 되돌아가서는안 된다.”미쓰요씨

1924년(타이쇼 13) 4월 4일 도쿄에서 태어남. 1939년(쇼와 14) 쇼톰베츠 고등 소학교 졸업. 같은 해 쇼톰베츠 환통운송사에 근무. 1940년(쇼와 15) 나카톰베츠 영림서 케토베츠관행사업소에 근무. 1966년(쇼와 41) 아사히카와 영림국을 퇴직. 이후, 아야코 씨의 저작 활동의 매니저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949년 세례를 받음)

미우라 아야코가 그린 코바야시 타키지와 그의 어머니

イメージ(나는 소설을 쓴다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일인지 생각조차 못했다. …설마, 소설을 써서 …코바 야시 타키지가 살해 당하다니…미우라 아야코 지음 '어머니'단행본:1,155엔문고본:483엔두가지 모두 카도카와 서점 발행)
나는 소설을 쓴다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일인지 생각조차 못했다. …설마, 소설을 써서 …코바 야시 타키지가 살해 당하다니…

미우라 아야코 지음 '어머니'
단행본:1,155엔
문고본:483엔
두가지 모두 카도카와 서점 발행

솔직히 전 코바야시 타키지를 잘 모릅니다.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미우라씨가 구경 왜서 이런 나에게 타키지의어머니를 쓰게 했을까

---'어머니'의 후기에서---

'어머니'는 1992년(헤이세이4),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만년 70세 때의 작품입니다. 남편 미쓰요씨의 제안으로부터 꼭 10년이 걸렸습니다.

기독교 신자인 작가에 있어 집필은 곧 선교활동입니다. 공산주의자의 어머니란 제목 때문에 작가는 많은 시간 망설여 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취재를 시작해서부터 작가는 타키지의 가정이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너무나 밝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었음에 놀라게 됩니다.

코바야시 타키지의 어머니 세키씨는 1873년 (메이지 6), 아키타현의 석가우치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식구를 줄이고자 13살에 이웃 마을의 코바야시 집안으로 시집와 무던한 남편과의 사이에 타키지를 비롯한 6남매가 태어나게 됩니다. 여섯 자식 모두가 하나같이 어머니를 닮아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꾸벅꾸벅 일 잘하고 착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세키씨의 4,5살의 아이 적부터 88세까지의 인생이 조용히 그 누구와 대화를 나누듯 적혀져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넘쳐나는 가정은 곧 코바야시 타키지의 그 깊고 깊은 인간애가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 시켜 줍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자 아야코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은 타키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경찰에 체포 돼 못과 같은 물건에 살해되어 어머니 곁으로 돌아온 타키지. 그것은 곧 배신으로 말미암아 살해당한 예수 그리스도가 못에 박혔던 십자가로부터 어머니 마리아의 품으로 안겨지는 '피에타'상 그 자체였습니다.

"난 이 세상의 도리 같은 건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부모께 효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질고를 헤아릴 줄 아는 타키지가, 그처럼 처참하게 죽지 않으면 아니될 악당이었다고는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런 아들의 죽음에 올바르게 흑백을 갈라줄 이가 있는지 없는지, 세키씨의 그 절절한 심정을 어떻게든 써내기를… 저자의 남편 미쓰요씨의 바램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책은 타키지나 연인 타키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인간애를 보여주는 소중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세키라고 하는, 글은 읽지 못했어도 한결같이 아들을 믿어주고 사랑해 온 한 어머니의 모습이 '빙점', '시오카리 고개' 등 대작들과는 또 다른 형태로 많은 감동을 불러 일으켜 연극으로까지 각본 되었습니다.

오타루시 이로우치마치에 있는 시립 오타루문 학관에는 많은 코바야시 타키지의 재료 외에도, 어머니 세키씨에 관한 재료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키씨의 초상화며, 타키지의 죽음으로부터 30년이 지나서도 가시지 않는 어머니의 비통함을 적은 시 '아, 또다시 이 2월이 왔구나' 등을 볼 수가 있습니다.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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